가리워진 길

친구가 준 간세인형을 볼 때마다 눈물이 핑 돈다

여고시절,

운동부였던 나는 저녁 훈련이 끝나도 곧장 교실로 가지 않았다.

야간자율학습 대신 연극부로 향했고, 써클실 한 켠에 가만히 앉아 연기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는 일은 내 하루의 낙이자 마침표였다.

그렇게 연극부 친구들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진이의 소식은 아주 최근 인스타그램을 통해 접하게 되었다.

보고 싶은 맘은 컸지만 괜한 부담이 될까 먼저 만나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나의 제주여행을 알게 된 진이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내 결혼식 이후 각자의 삶의 굴곡을 지난 거의 삼십 년 만이었다.

오랜 헤어짐의 시간 동안 진이는 이미 제주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긴 세월을 건너 만났지만, 우리 이야기엔 남편이나 자식, 돈 이야기를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만나는 순간 순식간에 열일곱 여고생으로 돌아갔다.

그 시절 꿈꾸었던 많은 것들과 앞날을 알 수 없어 서툴게 길을 찾으면서도, 학교에 가는 게 최고의 재미였던 그저 서로의 존재만으로 행복했던 순간들.

여고시절, 스무 살 이후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던 소녀들은

세월을 한꺼번에 지나

지금은 노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처럼 여전히 희망을 품고 서로의 꿈을 응원한다.

운동부 부장으로 세상을 무서울 것 없이 누비던 시절, 나는 종종 늦은 밤 진이를 집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마치 어젯밤 집 앞에서 헤어졌다 오늘 다시 연극부 써클실에서 만나 수다를 떠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진이가 건넨 제주 올레 안내서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끊어진 길을 잇고, 잊혀진 길을 찾고, 사라진 길을 불러내어 걷는 사람들이 걷고 싶은 만큼 걸을 수 있는 긴 길.

여고 시절 어두운 밤길을 걸으며 집으로 향하며 함께 불렀던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은 안갯속에 숨겨져 있던 그 시절 우리의 삶에서 세월을 돌아 마침내 서로를 다시 잇고 찾아내고 불러내는 다정한 길이 되어주었다.

이번 제주 여행은 고마운 이정표인 것이다.

“가을에 제주에 와. 억새가 이뻐. 그땐 서쪽에서 머물렀으면 좋겠어”

“겨울에 제주에 와. 눈 덮인 한라산 등반 같이 하자.”

제주에서 돌아오는 배 위에서, 또 하나의 기적 같은 연락을 받았다.

캐나다로 간 이후 연락이 완전 끊겼던 연극부의 또 다른 친구 원이.

몸이 약해 자주 쓰러지던 원이를 나는 자주 업고 집까지 바래다주곤 했다.

이상하게도 내 등은 그때 업었던 친구의 여린 체온을 기억하고 있다.

진이를 통해 내 소식을 들은 원이는 지금 한국에 있다고 했다.

가을, 날이 선선해지면 만나기로 했다.

쉰을 넘어선 내 삶에,

내가 가장 찬란했던 그 시절의 사랑하는 친구들이 다시 걸어 들어오고 있다.

글쓴이

hurmannhusse

■ Granny Chic 세상 멋진 할머니로 살기 ■ 이과적 사고로 돈을 벌고 문과적 감성으로 삶을 즐깁니다. ■ 비틀즈는 Beetle 딱정벌레에서 e를 a로 바꾸면서 Beat 박자라는 의미를 주었던, 사랑하는 Hermann Hesse 헤르만 헤세의 e를 u로 바꾸면서 저의 브랜드명 Hurmann Husse 허름한 허세가 탄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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